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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영혼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

복음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부분 중의 하나로서 ‘유일하게 파멸시키는 이적’으로 기록된 예수의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은, 많은 주석가들에게 어려운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이 문장에서 쓰인 ‘저주’란 단어는 헬라어로 ‘카테라소’ ( kathravswi) 이며 ‘정죄하다’, ‘판결하다’ ‘운명짓다’ ‘재앙을 빌다’의 뜻도 가지고 있는데, 광야에서 40일간의 극도로 굶주린 중에도 돌을 떡으로 만들기를 거절하셨던 예수께서, 어떻게 아무잘못 없는 무화과나무를 단지 열매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하실 수 있는가? 성경에는 <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라고 설명까지 덧붙여져 있는데, 어떻게 ‘사랑의 화신’인 예수께서 자신의 피조물을 저주하실 수 있는가?란 의아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Moreton Bay Fig Tree
Moreton Bay Fig Tree by ~Prescott 저작자 표시비영리
< 무화과 나무 >


보통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무화과는 3월경에 잎이 나서 6월경에 열매를 맺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유월절 무렵인 4월 중순경에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 한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기독교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은선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채,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며,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교훈’ 이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해석의 토대위에, 왜? 예수께서 말도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는지도 의문을 갖지 않을수 없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부분인, 예수그리스도의 ‘신분’에 그 답이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무화과나무에게 열매을 원하셨던 점을 생각해 볼때, 예수께서 하신 행동은 전혀 이상한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법칙’과 ‘순리’, ‘계절’들은 모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세우신 작품으로써, 예수께 순응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무화과나무 또한 ‘계절’이나, 그 밖에 다른 ‘외부조건’에 상관없이 천지의 주인이신 그분께 복종해야 하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일들이 ‘자연법칙’과, ‘순리’를 초월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창조주 앞에선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사람으로 이러한 놀라운 믿음을 가진 사람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브라함을 들수 있는데,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로 ‘미리 약속하셨던’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령하셨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였으며, 후에 그가 고백하길 <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였다 > 라고 함으로써 그의 놀라운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식물인 무화과나무를 저주까지 하신 것은, 아담의 타락과 후세 사람들의 범죄로 영안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사람들보다, 동물이나 식물들이 ‘영적으로 열려 있었으며’, 그러한 반면에 창조주인 예수께 순응하지 않았으므로 저주 받은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예로는, 선지자였던 발람보다 짐승이였던 나귀의 영안이 더 밝았기에 인간의 육안으로 볼수없었던 천사를 나귀는 볼수 있었으며,


< 민 22:31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


성도들이 고대하는 ‘영광의 때’를, 피조물 역시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비춰볼 때 피조물도 보통의 사람보다는 영적인 안목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19 피조물 ( 크티세오스 - 창조물 )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


끝으로 예수께서 ‘저주’하셨다는 것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예수로 말미암는다면 무화과나무도 때 이르게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것이 되며, 성도들 또한 예수가 원하는 때에 ‘온전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순리’와 ‘자연법칙’들을 ‘초월’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믿음’과 ‘소망’을 간직한 이들에겐 오히려 ‘희망’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 영안이 열려 천사를 볼수 있었던 나귀 >